일상

유행에 민감한 아이들?

Bioholic 2021. 4. 11. 15:55

15년이 넘는 미국생활에도 저는 인종차별을 거의 겪어보지 않았습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할지, 기억력이 나빠서 다 잊어버린건지, 아니면 제가 너무 둔해서 당해놓고도 그게 인종차별인지 모르고 지나간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딱히 경험담을 들려줄 정도로 뭔가 당했던 사건이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한 5분간 열심히 생각을 해봤는데, 기본적으로 저는 예민하기 때문에 모르고 지나갔을리는 없고, 무언가 불합리하거나 기분 나쁜 대우를 당했다면 분명히 인지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 당할법한 인종차별이라는 것은 결국 매우 미묘하고 사소하거나, 제가 비용을 지불하면서 받는 서비스에 만족하지 못했을 때 정도였을테고, 따라서 그정도 애매모호한 차별을 당했다고 느꼈다면 그냥 애써 '내가 과민반응인가?' 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거나, 아니면 '저런 언행을 하는 인간은 수준이 떨어지는 인간이고, 그런 놈이 나한테 저렇게 해봤자 내가 대응할 필요가 없다' 라는 생각에 문제 삼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길을 지나가다 묻지마 폭력에 당했다던가, 직장에서 혹은 커리어 관련으로 불합리한 차별/불이익을 받았다면, 뭔가 그에 상응하는 대응을 했을 것 같습니다만, 운이 좋게도 아직은 그렇게까지 험한 꼴은 당하지 않고 살아온 것이지요.

 

저는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미국에 와서 살고 있지만, 제 아이들은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이곳에서 태어나고 살게 되었습니다. 한국인이라는 이유 혹은 아시안이라는 이유만으로 미국땅에서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다건가 차별을 겪는다면, 제가 느끼는 감정이나 충격보다, 제 아이들이 받을 그것이 훨씬 더 크게 다가올 것은 자명합니다. 이 아이들은 자기 나라에서 살고 있을 뿐인데, "너네 나라로 돌아가" 라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저야 물론 돌아갈 나라가 있습니다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미국... 총기 문제와 구조적 인종차별을 포함해 많은 문제들이 누적돼왔고 트럼프 이후로 이러한 문제들이 노골적으로 수면위로 올라오면서 더더욱 엉망진창입니다. 특히 2020년부터 코비드19 팬데믹 대응도 엉망이었고, 흑인에 대한 경찰의 과잉대응 문제로 폭동까지 일어나고, 막판에는 트럼프 지지자들 (혹은 백인우월주의 폭도들)이 의사당 난입까지... 그리고 이제는 아시안에 대한 혐오범죄가 또 극성입니다.

 

아시안을 타겟으로 하는 범죄가 최근들어 공론화되면서 사실 저도 그동안 알게 모르게 우울한 마음이 들었던건 사실입니다. 나에게도 언제든지 저런 일이 생길 수 있고 내 가족들에게도 생길 수 있는데 그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아니면 애초에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결론은 이 나라를 떠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긴 합니다만... 그럴 수는 없으니 그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이 나라는 왜 이모양 이꼴이어서 우릴 힘들고 불안하게 하는가. 그러면서 우울해 지는 것이지요.

 

쓸데없이 길어졌는데, 아무튼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제 딸이 학교에서 험한 꼴을 당하고 왔기 때문입니다. 8살 짜리 남자애가 7살 짜리 여자애에게 막말한 것이 얼마나 험한 꼴인지 판단하는 것은 주관적인 부분이긴 하지만, 제 딸은 이번 일로 너무 큰 충격을 받았고, 다시는 이 방과후 프로그램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할 정도로 상처를 받았습니다. 

 

금요일, 접수가 시작되자마자 저는 제 딸이 여름방학에도 이 방과후 프로그램에 다니도록 등록을 했습니다. 편의상 CC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아침, 아이에게 여름방학 동안 CC에 다니게 될거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자기는 절대로 거기 가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거기 애들도 싫고 선생님들도 싫다고 합니다. 이렇게까지 싫어하지는 않았는데 왜그런지 자세히 물어보니 이제서야 지난주에 벌어졌던 일을 얘기해 줍니다.

 

작년 8월부터 온라인 수업 기간 동안 다녔던 CC의 같은 반에 O라는 남자 아이가 있습니다. 저희 아이에게 못되게 구는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수 십번도 넘게 이 이상한 남자아이에 대해 저에게 불평을 했었거든요. 애들 사이에서 있는 일이니 딱히 제가 관여할 수 있는게 없었고, 만약 너를 너무 괴롭히면 선생님에게 바로 얘기하라고만 일러두었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에는 아무리 일러도 선생님들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해 왔습니다. 그냥 같이 놀지 말라고만 하고 딱히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은채 4월 5일에 대면수업이 시작되었고, 이제 더이상 저 CC에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건은 CC에서의 마지막 날인 4월 2일에 있었습니다. 아이는 같은 반의 다른 여자 아이 (B)와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O가 오더니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I’m not gonna play with you or talk with you because you are Asian.”

 

저희 아이는 너무 충격을 받아 아무런 대응을 못하고 있었고, 같이 놀던 B가 대신 “Stop being mean to her”라며 대꾸를 해주고 아이를 위로해 주었다고 합니다. 어차피 선생님이나 아빠에게 말해봤자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는걸 이미 학습했기 때문에 저희 아이는 여지껏 아무에게도 말을 안하고 혼자 품고 있었던 것이었지요.

 

제가 느낀 분노와 미안함은 아이가 받았을 충격이나 불안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아침에 바로 CC 책임자에게 이메일을 보냈고, 아래와 같이 틀에 박힌 답장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제가 무언가 더 취할 액션은 없어 보이지만, 앞으로 어떻게 처리되는지 팔로우업 하면서 추후 대응을 결정할 생각입니다.

 

아시안을 향한 적대적인 폭력이 증가하면서, 이러한 문제를 미국 사회에 공론화 시켜서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 시작점은 제대로 문제를 파악하는 것이고 그럴려면 교육이 필요합니다. 저 역시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하는 단계였고, 언젠간 제 아이들과도 대화를 하고 알려주어야 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준비가 되지도 않았는데, 아이들과 이러한 주제로 대화를 해야할 시기가 이미 코앞에 와있다는 것을 이번 사건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뜩이나 아이 키우는 것은 쉽지 않은데... 점점 더 어려운 일들이 늘어나는 것 같네요.